아름다운 순간을 붙잡으려는 몸부림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2010)는 한 인간이 언어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려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 미자는 육십을 넘긴 나이에 손자를 키우며 살아간다. 그녀는 평범한 삶 속에서 새로운 감각을 찾고자 시를 배우기 시작하지만, 삶의 이면에는 무거운 현실이 도사리고 있다. 영화는 시를 통해 감정을 포착하려는 미자의 여정을 따라가며, 그녀가 겪는 현실의 무게와 감수성 사이의 충돌을 섬세하게 그린다. 미자는 시를 배우면서 사물과 순간을 새롭게 바라보려 하지만, 그녀가 마주하는 현실은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다. 손자가 저지른 끔찍한 사건과 자신의 몸에 찾아온 병은 그녀를 끊임없이 현실로 끌어당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자는 아름다운 문장을 찾고자 애쓴다. 그녀가 감탄하는 작은 것들—나뭇잎이 흔들리는 모습, 빛이 스며드는 순간—은 영화 속에서 그녀가 현실을 버텨내는 힘이자, 동시에 그녀가 도망치고 싶은 욕망을 반영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하지만 결국 시는 그녀가 현실을 마주하는 수단이 된다. 영화는 시를 통해 삶을 기록하려는 미자의 노력이, 결국 자신의 삶과 타인의 고통을 직면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들, 그 너머를 보다
미자는 시를 배우며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려 하지만, 시는 단순한 미화가 아니라 진실을 마주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녀가 맞닥뜨리는 현실은 너무나도 잔인하다. 그녀의 손자는 한 여학생과 관련된 끔찍한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 하지만 손자를 비롯한 가해자들의 부모들은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만 한다. 미자는 손자의 범죄를 외면하고 싶으면서도, 그것을 외면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녀는 시를 배우면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는 감정들’을 마주하게 된다. 영화는 단순히 언어로 표현하는 시를 넘어, 우리가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미자는 점점 더 시를 쓰기가 어려워진다. 처음에는 나뭇잎과 꽃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끼던 그녀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는 시를 쓰기 위해 삶을 깊이 들여다봐야 함을 깨닫는다. 그녀가 바라봐야 하는 것은 꽃이 아니라, 꽃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소녀의 존재다. 영화는 미자가 시를 완성하는 과정이 단순한 창작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정서적 선택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 시, 그리고 사라지는 흔적들
영화의 마지막에서 미자는 마침내 자신의 시를 완성한다. 그녀의 시는 단순한 글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가 바라본 세계에 대한 응답이며, 자신이 감당해야 했던 죄책감과 현실을 직면한 결과물이다.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미자의 부재를 암시하며,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읽어주는 시는 화면을 가득 채운다. 시는 그녀의 마지막 흔적이며, 그녀가 남긴 유일한 기록이다. 그녀는 사라졌지만, 그녀의 시는 남는다. 시는 언어가 삶을 어떻게 기록하고,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어떻게 담아내는지를 묻는 영화다. 결국 미자는 시를 통해 자신을 남기고 떠난다. 영화는 그녀가 떠난 이후에도, 시가 남아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울림을 남길 것임을 암시한다. 이창동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시가 단순한 언어의 조합이 아니라, 삶의 진실을 기록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시는 단순한 창작의 문제가 아니라, 한 인간이 자신을 표현하는 마지막 몸부림이자 진실을 마주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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