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키워드: #샹탈아커만 #페미니즘영화 #일상의_반복 #시간과_노동 #걸작선정 #정적인_관찰
기(起): 배경
1975년에 개봉한 샹탈 아커만 감독의 '잔느 딜망 (Jeanne Dielman, 23 quai du Commerce, 1080 Bruxelles)'은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 영화는 러닝타임 201분에 달하며, 중년 여성 잔느 딜망의 브뤼셀 아파트에서의 3일간의 일상을 극단적인 사실주의와 정적인 시선으로 포착한다. 2022년 영국 영화 전문지 '사이트 앤 사운드'가 선정한 '역대 최고의 영화' 1위에 오르며 그 예술적, 사회적 중요성을 전 세계적으로 재확인하였다. 이 작품은 여성의 가사 노동을 '보이지 않는 노동'에서 '존재하는 현실'로 끌어올린 혁명적인 시네마로 평가받는다.
승(承): 줄거리
영화는 잔느 딜망의 평온하고 예측 가능한 3일간의 일상을 느린 호흡으로 따라간다. 그녀는 매일 아침 아들에게 아침 식사를 준비해주고, 아들을 학교에 보낸 후 집안을 청소하며, 시장을 방문하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일련의 가사 노동을 완벽한 규칙성 속에서 수행한다. 그녀의 일과는 마치 기계처럼 정확하며, 작은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주의를 보여준다. 잔느는 이 모든 가사 노동 외에도 생계를 위해 매일 오후 짧은 시간 동안 남자 손님을 받아 매춘을 한다. 이 행위 역시 그녀의 일과 중 하나로 담담하고 형식적으로 처리된다.
전(轉): 절정
둘째 날, 잔느의 완벽하게 통제되던 일상에 사소한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평소라면 완벽하게 계산된 시간에 삶아지던 감자가 조금 일찍 완성되거나, 평소 늘 제자리에 있던 커피 통이 잠시 다른 곳에 놓이는 등의 아주 미세한 변화들이다. 이러한 일상의 어긋남은 잔느의 심리적 안정감을 흔들며 그녀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억압과 고독이 표면 위로 떠오르고 있음을 암시한다. 사소한 불규칙성들이 쌓여가면서, 잔느의 내면의 긴장은 극대화되고, 마침내 셋째 날 저녁, 이 모든 억압과 불안은 예상치 못한 형태로 폭발하게 된다.
결(結): 핵심
'잔느 딜망'은 여성의 삶과 노동, 그리고 억압을 다루는 데 있어 타협하지 않는 형식적 혁신을 보여준 시네마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이다. 델핀 세리그의 미니멀한 연기는 잔느의 존재를 스크린에 각인시킨다. 이 작품이 반드시 관람해야 할 핵심 이유이다.
- 시간과 공간의 페미니즘적 재해석: 영화는 가사 노동을 클로즈업이나 빠른 편집 없이 있는 그대로의 시간 동안 보여줌으로써, 여성의 노동이 지닌 물리적, 시간적 무게를 관객에게 체감하게 한다. 이는 '일상'이라는 공간을 정치적이고 중요한 영역으로 재정의한다.
- 형식을 통한 정서적 전이: 극단적으로 느린 템포와 정적인 카메라워크는 관객에게 지루함을 넘어 잔느가 느끼는 반복의 굴레, 고독, 그리고 내면의 불안을 공유하게 만든다. 관객은 잔느의 삶을 수동적으로 관람하는 대신, 능동적으로 그녀의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 델핀 세리그의 고독한 초상: 주연 배우 델핀 세리그는 대사나 과장된 감정 표현 없이, 작은 몸짓, 눈빛, 그리고 일과의 정확한 수행을 통해 잔느의 내면적 공허와 서서히 무너져가는 자아를 섬세하게 표현한다. 그녀의 연기는 이 영화의 조용하지만 강렬한 힘의 원천이다.
이 작품은 대중적인 영화 문법을 거부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관객에게 강렬하고 독특한 사유의 경험을 선사한다. 이 예술적이고 중요한 성찰의 시간을 직접 관람하기를 강력하게 추천한다.
[시청 정보] 영화 <잔느 딜망 (Jeanne Dielman, 23 quai du Commerce, 1080 Bruxelles, 1975)>은 현재 MUBI, La Cinémathèque Française, Google Play 무비 등에서 시청 가능하다.
[사진 출처]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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